중년탐정 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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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꾼으로 지내던 20대 시절. ( 음악과 무대 ) 서울에 살던 연인이 구미까지 내려와 자취를 시작했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있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와서는 호프 집과 전통 주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작은 원룸형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 집에 플레이스테이션2를 설치해 두고 자주 가서 게임을 했다. 당시 우리 집은 작은 방에 어머니와 동생까지 셋이 가득 차 있어서 게임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 언 해피 트리 ) 게임을 하다가 연인의 퇴근 시간이 되면 근처 전통 주점까지 마중가서 집에 바래다주었다. 그 이후에 나는 새벽 춤 연습이나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했다. 어느 날,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들어오라고 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집안이 엉망이었다. 도둑이 든 것이다.
서둘러 연인을 진정시키는 한편 행방이 묘연한 물건을 확인했다. 플레이스테이션2와 게임CD들. 그리고 내가 가져다 둔 세가 새턴. 마지막으로 그녀의 디지털 카메라. 일단 112에 신고했고 경찰관이 다녀가셨다. 서에 가서 신고서를 작성하기는 했는데, 도난 물품의 금액이 크지 않아서 아마 뒤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놀란 연인을 진정시키며 집에 돌아와 내 나름의 조사를 시작했다. 들어온 곳은 창문이다. 하지만 이 집의 창문은 체구가 작은 나 조차도 들어오기 쉽지 않았다. 바닥에는 먼지인지 흙인지 묻은 신발 자국이 있었다. 마지막 한 가지가 특이했는데, 게임기와 게임 CD는 가져가면서 전원 선과 RF 단자는 빼놓고 간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게임과 디지털 기기에 관심은 있지만 잘 모르고 작은 쪽창으로 들어올 수 있는 운동화 신은 어린 아이. 심지어 세가 새턴은 게임 CD와 컨트롤러도 없이 본체만 가져간 상태였다. 경찰에 이 진실 전부을 알려 주었지만 그냥 알았다고 하고 넘길 뿐이었다. 그래서 직접 범인을 찾기로 결심했다.
아파트 단지의 재활용품과 쓰레기통을 매일 돌아다녔다. 세가 새턴은 아마 버려질 것이다. 게임 CD도 없고 전원 선도 컨트롤러도 없는 본체는 아무 쓸모가 없거든. 과연 다음날 세가 세턴이 버려진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쓰레기장이 지정된 동 안에 범인이 있다. 남은 것은 신발 자국이었다. 다음날부터 그 동에 나보다 체구가 작은 아이가 몇이나 있는지, 그 중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몇인지 감시했다. 운이 좋았는지 아이가 몇 없었고, 복도식 아파트였기에 집 위치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아이가 있는 집들을 돌아다니며 신발을 보여달라고 했다. 신발 자국 사진과 크기에 운동화 밑바닥을 대조하고 다녔다. 그래서 범인을 찾았냐고? 물론이다. 아이의 부모님은 연신 죄송하다고 했고 플레이스테이션과 디지털 카메라를 돌려받는 선에서 이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세월이 지나 40대가 된 나는 조라 대표님의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 황혼의 ) 이 회사의 첫번째 게임인 던전 로그라이트를 출시하고 그 성과로 N사의 게임 개발 컨퍼런스에서 포스트모텀 발표를 진행했다. 내용 자체는 좋았고 도움이 많이 된다는 반응이었다. 회사를 알리기에도 게임을 알리기에도 괜찮은 기회였다. 문제는 그 직후에 발생했다. R웹은 게이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사이트이다. 여기에 내 컨퍼런스 내용이 올라갔는데, 악플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 그 괴문서에 관련된 것이었다. ( 아홉 번의 실수 ) 직원들 등쳐먹고 자기 혼자 돈 빼돌린 주제에 잘 먹고 잘 산다 던가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이 댓글을 시발점으로 사람들이 뒷 조사를 시작하면서 일이 커졌다. 두번째 마녀사냥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다시 예전처럼 협박 성 쪽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유경험자다. 멘탈을 보호하기 위해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라 대표님과 N사 측이었다. 악플은 점점 진행되어 N사가 컨퍼런스에 범죄자를 초청한다는 식으로까지 전개되었고 이를 두고볼 수는 없었다. 조라 대표님 입장에서는 이제 막 판매하기 시작한 게임에 부정적인 여론이 몰려드는 것도 싫었을 테고, 무엇보다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조라 대표님은 나를 데리고 경찰서로 가서 그 악플을 고소했다.
문제는 나머지 한 사람이었다. 경찰은 그를 특정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옛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찾아볼까? 해당 댓글의 아이디와 아이피를 추적했다. 그 끝에 있는 후보군을 검색하다 보니 몇 개의 PSN 아이디와 스팀 아이디에 도달했다. 해당 아이디로 다른 게임 게시판에 남겨진 글을 통해서 몇 날 몇 시에 어떤 게임을 했고 어떤 도전 과제에 정체되어 있었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게임 활동을 통해 범인을 특정해냈다. 이후 그를 추적해서 자격증 취득일과 번호, 졸업한 학교와 연도까지 찾아냈다. 경찰에 이 정보를 제공했지만, 그들은 애초에 PS 트로피나 스팀 도전 과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찾아낸 정보는 오히려 개인 정보 침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수사 기간이 종료될 때까지 남은 한 사람의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직접 연락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일이 커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집행유예 중인 범죄자니까.
문득,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면서 이걸 업으로 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안에서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경찰이 이런 사건을 제대로 수사해줄까? 피해 규모가 작다고 뒤로 미루는 것은 아닐까? 내가 당한 것처럼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동조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모두 내가 경험한 일이었다. 게이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고충을 해결해줄 수 있다면 이 또한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번 건만 보더라도 경찰이 찾지 못하는 것을 내가 찾지 않았나? 불법 체류자나 사기꾼 들도 게임을 통해 찾아내는 사례들이 있다고 한다. 게임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것만으로도 경찰들과는 다른 특별한 수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즈음 인터넷에서 한 광고를 보게 되었다. 뭐? 공인 탐정 자격증이 생겼다고?
해외에는 탐정이라는 직종이 실존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막 생겨나는 중이었다. 요즘은 탐정 예능 등이 나오면서 많이 대중화 되었는데, 그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게임 전문 탐정이 있으면 어떨까?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상관 없다. 본업이 탐정이 아니더라도 공부해두면 추리 게임을 만들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탐정이 직접 만든 추리 게임. 끌렸다. 곧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론 과목은 경찰 시험과 겹치는 것이 많았다. 따라서 현직 경찰들이 시험을 보면 면제되는 과목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마침 매일 퇴근 후 쓰던 원고는 출판된 이후였고 퇴근 후 시간이 비어 있었다. 공부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분량이 꽤 많았다. 시험 공부에 가장 방해가 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게임이었다. 하필이면 시험이 두 달 남은 시점에 몬스터 헌터 신작이 나온 것이다. 항상 나를 도와주던 네가 이번에는 왜 나를 가로 막는 거니? 바꿔 생각하면 오히려 좋았다. 그래, 한번 쯤은 너를 극복해보는 것도 좋겠지. 몬스터 헌터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공부를 했다.
시험일을 앞두고 다른 문제가 생겼다.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규정상 집행유예 기간인 사람은 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험 일자는 상관없었지만 신청 기간이 문제였다. 여러 번 전화로 사정을 했다. 이런 이야기도 했다. 제가 나름 사람이 많이 오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탐정 협회 입장에서도 지금은 홍보가 절실하시지 않나요? 제가 합격하고 나면 조회수가 꽤 나올 거예요. 꼭 합격 글을 올려서 홍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의미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시험을 볼 수 있었고, 결국 탐정 자격을 얻게 되었다. 협회에서 요청이 온 것은 아니었지만 탐정 자격증에 대한 포스팅을 했다. 내가 혼자 뱉은 말이라도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해당 글은 조회수가 2만 정도 나왔다.
합격 후에는 탐정 협회에 등록했고, 이후 작은 몇 가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일과는 다른 내용들이 많았다. 게임 전문 탐정이라는 것도 점점 의미가 없어져갔다. 멀티 플레이 게임들에서 점점 사람들의 대화가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임이 아닌 외부 메신져를 이용하는 경우도 늘었고, 애초에 MMORPG도 모바일로 가면서 커뮤니케이션 중심의 게임은 마니아 층 중심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서서히 변해갔다. 최초에 구상했던 게임 전문 탐정이 필요 없어지는 방향으로 세상은 변화해가고 있었다. 지금은 탐정 들의 그룹에 잠시 속해서 그들의 세상을 엿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년 자격 갱신 문자가 올 때마다 고민하게 되기는 하지만 탐정은 역시 내 길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자격증 딴 것이 아까우니 추리 게임이나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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